한국사 16장 광종
그는 왜 황제가 되려 했을까?
왕건의 적장자이자 고려의 제2대 임금이던 혜종의 죽음에는 석연치 않은 과정이 존재했다. 그리고 제3대 왕으로 등극한 왕요, 그러니까 정종도 평탄한 삶을 살았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945년에 즉위해 서경 천도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개경 중심의 호족 세력과 마찰을 빚었고, 개경 천도 계획은 좌절된다. 천도 실패로 왕실의 권위는 다시 실추됐고, 정국은 다시 요동쳤다. 이때 등장하는 인물이 있으니, 그가 바로 정종의 친동생 왕소다. 정종과 그의 동생 왕소는 친형제 사이였지만, 처가의 세력 기반은 달랐다. 후백제 사람 박영규를 장인으로 둔 정종과 달리 왕소는 신주, 황주, 평주 등 개경과 가까운 황해도 지역에 세력 기반을 둔 장모님이 든든한 뒷배였다. 심지어 왕소의 장인어른은 아버지 왕건이었다. 즉, 이복 남매와 결혼했다는 의미다. 정종의 즉위 과정에서 큰 분란이 없던 두 형제는, 정종이 서경 천도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삐걱대기 시작한다. 서경 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그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렸다. 개경을 중심으로 왕권을 새롭게 세우려는 시도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정종은 곧 죽음을 맞이한다. 천둥소리에 놀라 경기를 일으켜 병석에 누워 있다가 말이다. 천둥소리에 놀라 죽은 형을 대신해 왕소는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는데, 그가 바로 광종이다. 개경을 중심으로 한 호족 세력을 등에 업은 채 얻은 든든한 왕위였다. 하지만 이 말은 힘이 센 친척들이 주변에 가득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게다가 엄밀히 말하면 그들은 각자 독자적인 세력을 지닌 호족이었다. 아무리 피로 엮인 사이라고 해도 수틀리면 결국은 남이었다. 그의 두 형도 그렇게 당했다. 그래서였을까? 적어도 광종이 즉위하고 7년까지는 왕실과 호족이 공존하는 평화론 상태가 이어진다. 대화합의 정치를 구사한 것이다. 그러던 956년, 운명의 즉위 7년째가 되던 해에 변화가 찾아왔다. 광종은 고려가 이대로 흘러가다가는 또 다른 분열을 낳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개경과 황해도 밖은 저마다의 정치, 경제, 군사적 기반을 갖춘 세력으로 가득했다. "다시, 신라로!", "다시, 백제로!"를 외칠 인간들은 넘쳤다. 혹은 전혀 다른 슬로건으로 뜻밖에 세력이 들고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분명한 전환점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의 중심을 바로잡아야 했다. 그렇게 광종은 본격적으로 왕권 강화를 위한 행동에 나섰다. 이른바 노비안검법의 시행이었다. 노비안검법은 어진 임금님의 호혜적인 정책이었다. 노비들은 신분을 전수 조사한 후, 노비가 되기 전에 양민이었던 이들을 해방시켜 양민으로 만드는 조치였다. 전쟁 중에 지는 쪽에서 싸웠다는 이유로 혹은 돈이 없다는 이유로 노비가 된 자들은 임금의 명령으로 양인이 됐다. 이런 제도를 통해 국왕의 인기가 좋아져서 왕권이 강화된 것일까? 물론 아니다. 당시 각 지역의 호족이 소유하던 노비는 일종의 사유 재산이었다. 이 재산은 언제든지 군사력으로 활용 가능한 물건이기도 했다. 광종은 바로 이 지점을 노린 것이다. 노비안검법은 호족들에게 노비로 묶인 노동력이자 군사력을 뺏기 위한 정책이었다. 더불어 양인이 된 이들은 해방의 대가로 국가에 세금을 내야 했기에 중앙 재정은 자연히 늘어났다. 당연히 호족들이 불같이 일어났으나 광종은 흔들림 없이 첫 번째 왕권 강화책을 밀어붙였다. 바로 이때 광종의 최측근 후주 출신 쌍기가 등장한다. 후주에서 설문우와 함께 사신으로 고려에 왔던 쌍기는 병을 얻은 김에 고려에서 치료를 받다가 광조의 요청으로 귀화한 사람이었다. 쌍기는 광종의 사랑을 받으며 초고속 승진을 이어갔고, 광종 9년 과거 제도를 주관하는 자리에 앉는다. 고려에서도 본격적으로 과거가 시행된 것이다. 중앙에서 호족 출신 공신 세력의 힘을 억제하는 동시에 충성스러운 문신 관료를 스스로 선발해 힘을 실어 주겠다는 의도였다. 과거 제도는 그 자체로 엄청난 변화를 상징했다. 골품이 모든 사회 영역을 지배하던 이전 사회 구조와의 이별을 의미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호족 세력에게 과거 제도는 노비안검법보다 더 큰 도전으로 다가왔다. 집안 배경 덕에 중앙 관료로 진출하던 호시절은 이제 없었다. 물론 순식간에 과거 출신 모든 관직을 다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집안만 믿고 관리가 되던 이전과는 사회 구조 전혀 달라졌기에 권력층의 개편이 예고됐다. 광종은 여기에 더해 관료들의 패션에 간섭하기 시작한다. 당시에는 신라, 태봉, 후백제 시절 예복을 섞어 입는 등 위계질서 없이 가지각색의 옷을 입었다. 광종은 이 개성을 하나의 질서로 통제하기 시작한다. 보라색, 붉은색, 연두색, 자주색 소매 옷으로 나눠 관료의 등급에 따라 관복을 입도록 한 것이다. "내 밑으로 다 통일해"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왕의 권위는 조금씩 올라가고 있었다.
왕권 강화를 위한 광종의 승부수
노비안검법, 과거 제도 시행, 관복 제정까지 호족 세력에게 선전 포고를 날린 광종은 뒤이어 결정적 한 방을 먹인다. 이른바 고려를 황제국 체제로 만들겠다는 선언이었다. 물론 이런 과감한 조치 뒤에는 당나라 멸망 이후 오대십국으로 분열된 중국의 상황도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가 황제임을 스스로 칭한 데에는 외적인 의도보다는 내적인 의도가 짙었다. 광종이 본격적으로 황제들만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을 대내적으로 썼던 시기는 그의 왕건 강화 움직임이 본격화되는 시점과 같다. 그러니까 광종은 각자의 지방에서 주민들을 다스리며 마치 왕인 듯 행세하는 호족들에게 "난 그냥 왕이 아닌 황제야"라고 선언하며 엄포를 놓은 것이다. 창제 건원이라는 자주적 정책의 이면에는 이렇듯 국왕 중심의 정치 체제를 완성하려는 광종의 의지가 강력하게 내포돼 있었다. 고려가 이른바 "외왕내제"의 전략을 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사실상 호족과의 전쟁이자 왕권 강화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행위였던 것이다. 고려가 만들어진 지 이제 막 30여 년 남짓 된 시기, 아직 국왕과의 줄다리기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한 호족 세력은 당연히 거세게 반발했다. 반대로 광종은 여기서 승부수를 띄우지 않으면 다시 분열의 시간을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곧 고려에는 엄청난 숙청의 바람이 불었다. 역모는 물론 암살 위협도 이어졌다. 광종은 조금이라도 의심이 들면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감옥은 가득 찼고, 귀양 가는 이들이 줄을 이었다. 죄가 중해 죽어 나가는 이들도 있었다. 말 그대로 공포 정치 시기였다. 심지어 집권 과정과 즉위 초에 힘을 보탰던 최측근들까지 숙청 대상에 포함됐다. 자신의 이복동생 효은 태자 그리고 태자인 경종조차 믿지 못했다. "경종이 즉위할 당시 옛 신하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40여 명에 불과"했다는<고려사>에서의 평가는 이 시기 광종의 숙청이 누구를 향했는지 명확히 표현한다. 광종이 겨눈 칼날은 옛 신하, 그러니까 고려를 만드는 과정에서 왕건과 혼인으로 엮여 영향력을 키워온 세력 전부였다. 광종은 그의 형들이 겪은 일을 반면교사로 삼으려 한 것이다. 하지만 공포로만 나라를 다스릴 수는 없었다. 흔들림 없이 정책을 추진하려면 무엇보다 광범위한 백성들의 지지와 함께 친위 세력도 필요했다. 그때 광종이 생각한 것이 종교였다. 불교를 국가 안으로 깊게 끌어들이면서 승려 세력을 양성해 호족 세력에 반발하는 일반 백성까지 껴안으려 했다. 이렇게만 놓고 보면 대단히 성공적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대단히 공허했다. 자신에게 도전하는 호족 세력은 제압했지만, 그것이 곧 국왕 중심의 튼튼한 시스템을 완성한 것은 아니었다. 중앙 정부의 행정력은 여전히 지방까지 완연히 침투되지 않았고, 여전히 각 지방에는 영향력이 강한 유력 집단이 존재했다. 하지만 광종이 만든 시스템은 그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광종이 기획한 정치 시스템은 이후 중앙과 지방이 팽팽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게 한다. 적어도 이 길항 관계는 무신들에 의해 나라가 완전히 뒤집히는 변태적 과정을 겪기 전까지 유지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