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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한국사 11장 통일신라

by 분왕이 2023. 10. 17.

"나라가 망했다. 그동안 충성을 바치던, 아니 세금을 바치던 윗선이 사라졌다. 그런데 엊그제 전쟁터에서 옆집 막내아들을 죽인 녀석들이 세금을 바치고 충성을 맹세하라고 한다. 생각해 보니 작은할아버지도 그 전쟁에 나갔다가 저들 손에 전사하셨다고 하지 않았나? 화가 난다. 원래 이 바닥을 주름잡던 윗선이라고 마음에 들던 건 아니었지만, 저들은 더 싫다. 어라, 그런데 뒷동네에서 큰소리 조 내던 어르신이 나서서 저들과 싸우자고 하네? 밑져야 본전인데 같이 싸워서 작은할아버지 복수나 해주자!"

 

나라가 망한 뒤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에서 벌어진 일이다. 윗선은 아랫것들에게 싸움의 정당성을 만들어주기 바빴다. 고귀하신 윗선이라고 별것 있었겠는가. 한자리씩 차지하던 이들은 최종 결제자의 도장이 바뀌다 보니 자신의 자리가 사라질까 두려워 칼을 들고 아랫것들에게 들고일어나 싸우자고 했던 것이다. 복잡한 국제 관계와 치열한 정치적 주도권 싸움의 밑바닥은 사실 단순하다.

 

 

 

망국을 하나로 묶은 프로파간다

 

신라는 이미 전쟁 중에 백제와 고구려 유이민 세력의 고위급 인사를 상대로 포섭 정책을 펼쳤다.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이겨야 했기에 적극적인 것도 있었지만, 높은 분들이 상대적으로 다루기 쉬웠기에 빠르게 포섭했다. 그들에게 기존의 사회적 지위와 현실적 이익을 보장해 주면 그걸로 충분했다. 신라에서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이익은 곧 골품 제로의 편입을 의미했다. 나라가 바뀌어도 기존의 신분과 관등이 제대로만 보장되면 포섭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기존의 군현 체계나 지역 명칭도 그대로 사용됐고, 각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고위급 인사는 이전과 같은 대우를 받으며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상황이 달라졌다. 골치 아픈 당나라가 한반도와 평양 이북에서 군을 철수하고 한반도에서의 분란을 마무리 지은 것이다. 이제 신라가 온전히 감당해야 할 몫이 커졌다. 병합 과정에서 넓어진 강역, 유이민의 유입으로 늘어난 인구는 완전히 새롭게 관리해야 하는 기회이자 위험 요소였다. 백제인도, 일부 고구려 유이민도 이제 다 신라 국왕의 신민이 됐다. 백제와 고구려의 높으신 분들을 포섭해 간이로 관리하던 방식에는 한계가 있었다. 장기적으로 위험 요소가 너무 많았다. 이들이 언제 딴소리할지 모를 일이었다. 제대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체제가 필요했다. 신라는 전쟁이 끝난 지 10년 만인 685년, 전국을 9주로 나누고 지방 제도를 개편한다. 옛 고구려 땅에 3주, 백제 땅에 3주, 기존 신라 땅에 3주를 두고 균등하게 통치하겠다는 의지였다. 여기서부터 시작이었다. 이른바 삼한일통 의식을 만들어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품었다고 홍보하기 시작한 것이다. 훌륭한 프로파간다였다. 그간의 길고 치열했던 전쟁을 하나가 되기 위한 시간으로 포장하면서, 우리는 하나라고 외쳤다. 평화의 시기가 도래했고, 통합의 시기가 찾아왔다. 기본적으로 언어가 비슷했던 이들은 문화적으로 자연스럽게 융화될 수 있었다. 위에서 내리꽂은 삼한일통 의식과 함께 진행된, 지역에서의 문화적 융합은 자연스럽게 주민들을 통합했다. 그렇게 땅이 넓어지고, 인구도 늘고, 백성을 하나로 묶을 통일의 이념도 만들어지자 신라는 차츰 안정을 찾았다. 정복 활동에 성공한 국왕권은 막강해졌다. 김춘추 직계로 이어진 왕계는 신라의 국왕권이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안정화됐음을 의미했다.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중앙 통치 체제가 완성돼갔다.

 

하나가 된 줄 알았는데 왜 후삼국으로 나뉘었을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그렇게 잘 통합되고, 나라도 융성했는데 왜 후삼국으로 다시 나뉘었을까? 오랜 전쟁이 종식되고 평화의 시기가 찾아왔을 때, 사람들은 그 자체로 만족했을 것이다. 당장 내일 전쟁터에 안 나가도 된다고 할 때, 사람들은 작은 보상만으로도 감사했다. 기존 신라인과 유이민 사이에 존재했던 작은 차별은 넘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평화의 시기가 길어지면서 사소한 차별에 대한 불만이 수면 위로 급격히 올라왔다. 중앙군으로 불리던 9서당안에서는 신라인과 비신라인이 구별됐다. 그 구별이 곧바로 차별로 이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구분 자체가 삼한일통이라는 대통합의 이념과 맞지 않았다. 골품제에서도 차별은 있었다. 백제와 고구려의 유이민들에게는 각각 5두품과 6두품을 상한선으로 규정했다. 유이민들은 전쟁 중에 얼떨결에 받은 신분으로 인해 이토록 영향력이 제한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생각보다 골품제는 강고했고, 중앙 정치에서 그들의 영향력은 미미했다.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가 누리던 호시절과 비교할수록 손해 보는 장사로 느껴졌다. 신라의 유이민 통합 정책은 실패했고, 백제와 고구려 유이민들은 끝내 진정한 신라인으로 재탄생하지 못했다. 그들은 신라인들에게 여전히 비신라인이었다. 신라 말기로 접어들어 막장의 정치 활극이 벌어지고, 이어서 각 지역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자 전국에서 호족들이 난립한다.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옛 백제와 고구려 땅에서 칼 들고 일어선 호족들이 내세운 정체성이 다름 아닌 "다시 백제로!", "다시 고구려로!"였다는 점이다. 다시 나뉜 신라에 주목해 당대를 바라보면 신라의 한계점은 분명했다. 하지만 분열과 통일이라는 역사적 과정이 비단 한국사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 해보면 시사점이 달라질 수 있다. 어느 지역에서든 이 과정은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전쟁에서 이긴 신라가 유이민을 통합하고 삼한일통의 이념으로 통일의 정당성을 덧입히려 한 것도 자연스러운 역사적 과정이었다. 세 나라의 유기적인 통합을 통한 한반도 땅의 원활한 관리는 이후 고려의 왕건에게도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된다. 이때 왕건이 선택한 방식은 신라와는 달랐다. 나라의 이름부터 지배층의 구조까지 모든 것을 바꾸는 새로운 선택을 한 것이다. 고려의 선택은 과연 성공했을까? 이제부터 우리는 그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